[SYNC 5호]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힘없는 판타지
불의한 재벌을 국가(사)권력이 어떻게 비호하는지를... 눈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하나님 부처님 자연의 신이여 나에게 저 벽을 넘을 수 있는 초능력을....
2차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내려갔던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 부산 영도에 강림한 닭장차형 명박산성 앞에서, 그것으로 상징되는 넘을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초능력을 바랐다. 힘없는 사람들이 불의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기댈 것은 결국 초(超)현실적 힘이다.
그래서 초현실적 세계나 현상을 담은 판타지 장르는 유난히 현실을 전복하려 한다. 거의 모든 판타지의 내러티브 속에는 바꾸고 싶은 현실과 그 현실을 바꿀 초현실적 힘이 들어서 있다. <홍길동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해리포터>나 <엑스맨>, <반지의 제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초현실적 설정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재벌 3세 백화점 사장과 부모 잃은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몸이 바뀌는 기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뒤집어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서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높고 두터운 현실의 벽이다. 이처럼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판타지 이야기 속에는 초현실적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현실이 전제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판타지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날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도저히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날 공산은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기적을 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해보려는 것이 판타지의 시도다. 혹 판타지에 빠지는 것을 잉여나 오타쿠의 길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자기계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내’ 현실이야 어떻게든 바꾼다 해도 ‘우리’들의 현실은 바뀔 가망이 없다. 결국 내 입에 풀칠하거나 혼자 떵떵거리면서 우리의 문제에는 눈을 감아 ‘우리’를 ‘그들’로 치환하는 게 상책이다. 허나 상책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못마땅하다면? ‘우리’로서 연대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바꾸어 나가거나, 다시 판타지로 돌아올 밖에.
하지만 판타지에 빠지는 것이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시도보다 저열한 무엇은 아닐 수도 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말했듯 애초에 판타지는 현실의 확고부동한 부정성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때로는 판타지로 인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힘을 얻기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낚시 저녁에는 목축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마르크스가 상상 속에서 그린 공산주의의 결과적 장면이지만, 노동에 찌든 이들에게는 세계를 바꿔야 할 당위로 작동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앞서의 판타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단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힘이나 의지가 다른 판타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 이 만화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현실 즉, 이야기 속 ‘이승’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3부작 중 현재 완료된 두 편 모두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두 세계는 확고한 경계와 법으로 나뉘어 있다.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이로 이승에 속한 이는 저승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저승사자들 역시도 사자(死者) 이송 업무 외에는 이승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 있다. 이 힘없는 신들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이승의 부조리에 눈 감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슈퍼히어로물이나 기적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의 판타지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어쩌면 슈퍼히어로물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독자들 안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웃기고 울리기에 있다.
웃고 울기
먼저 웃자. <신과 함께>의 웃음은 해학과 풍자에서 발생한다. 이야기가 웃음을 주는 방식을 논할 때 자주 함께 사용되어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는 해학과 풍자는, 그 자체로는 웃음과 상관없는 요소를 새로운 맥락 안에 배치하는 것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커피숍이나 사대강 사업 자체는 웃기지 않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저승 안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 웃음의 질이나 웃는 독자가 느끼는 감상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해학과 풍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둘은 주체(독자)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해학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낸다. 앞서 든 예처럼, 커피숍이 저승에 헬벅스(Hellbucks)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웃음을 줌과 동시에 저승에 대한 친숙함을 이끌어낸다. 독자가 경험적으로 익숙한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가까이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풍자는 대상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환기하면서 거리를 확인하게 하고 더 멀어지게 한다.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독자가 저승중심부를 관통하는 강인 삼도천이 하천 정비사업으로 물줄기가 직강화되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 그는 웃음과 동시에 사대강 사업에 대해 가졌던 비판적 정서를 감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저승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될 수 있지만, 대개는 원래 비판하던 하천 정비사업이 저승까지 망치고 있다는 식의 감상으로 이어지게 될 공산이 높다. 이 경우 거리가 멀어지는 대상은 사대강 사업이 된다. 더 극명한 예로, 불효자를 가두는 한빙지옥이 불효자 급증으로 넘치는 제소자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다는 ‘저승타임즈’ 기사는 불효자와 이승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해학과 풍자는 독자 안에서 어느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는데, 이 때 대상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신과 함께>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해학은 저승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혹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 독자의 거리감을 좁히고, 풍자는 이승의 부정성을 인식시키며 이승 및 이승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거리감을 넓히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독자는 만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저승의 자리에서 이승을 바라보게 된다. 이 말은 독자가 이승보다 저승을 좋아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저승이 독자에게 이승을 바라볼 가상의 공간으로 작용하여, 이를테면 저승에서 확고하게 적용되는 권선징악과 같은 법칙이 독자에게 내면화된다는 뜻이다. 그 시선으로 이승을 바라보게 될 때, 독자는 그들이 바라본 구체적 대상에 따라 다음 댓글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혀 뽑힐 정치인 많겠네” / “나 튜브 타면 어쩌지.ㅜ.ㅜ” /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처음에는 가벼운 웃음이었던 것이 <신과 함께>의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타자를 바라볼 때는 냉소나 조소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윤리적 태도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이 <신과 함께>가 만드는 웃음의 힘이다.
이제 울 때다. 앞서의 웃음은 모험담의 틀을 취했던 <저승편>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반해 울음은 <이승편>의 지배적인 정서다. 하지만 <저승편>에도 이승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병렬되었는데, 이 이승 역시 눈물 나게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는 저승을 이승(=근현대)처럼, 이승을 저승(=지옥)처럼 그리려고 했다는 작가의 의도와도 부합한다. <이승편>의 눈물을 살피기에 앞서 <저승편> 안에서 이승을 그린 장면을 먼저 보자.
<그림1> 신과 함께 저승편 65화 ⓒ주호민
<그림1>에서 흐느끼고 있는 인물은 죽은 유성연 병장이다. 그의 죽음과 그 후의 이야기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 흐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이 장면은, 그러나 배경을 통해 비애감을 증폭한다. 지면에 근접한 창문과 전봇대에 기댄 쓰레기봉투를 담은 첫 두 칸, 미디엄숏 속에 창문을 담은 다음 칸. 그리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달동네의 풍경 속에서 차사들의 발목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말풍선이 흘러나오는 마지막 칸. 주거의 지옥(지하와 옥탑방)인 반지하는 거주자의 가난을 표현한다. 쓰레기봉투도 가난한 자의 삶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창문이다. 낮은 창문이 반지하임을 증거하듯 여러 칸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만화를 가장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를 창문이라고 생각해 보자. 만화의 칸처럼 네모난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온통 가난한 자의 삶이다. 창문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을 바꿀 수 없다.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적어도 이승을 그릴 때만큼은 한울동이라는 달동네의 풍경을 꾸준히 비춘다. 창문은 그러나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풍선까지 통과시킨다. 보이고 들린다. 보고 듣는다. 그래서 눈물이 창문을 통해 흐를 수 있다. 보이는 이들의 슬픔이 보는 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잠깐만 만화의 중요한 특징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 만화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매체로 자리 잡고, 또 정서적 이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카툰화(化)의 효과가 크다. 스콧 맥클루드가 <만화의 이해>에서 말했듯, 독자는 실제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그린 그림일수록 그것을 독립된 특징을 지닌 타자로 인식하며, 보다 더 단순화한 그림일수록 그것에 독자 스스로 성격을 부여하고 더 쉽게 동일시하게 된다(그는 이것을 탈바가지 효과라고 불렀다). <신과 함께>의 화풍은 한 눈에 보아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작품 내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보통 사람들과 더 쉽게 연결하게 된다. 때로는 그림 속 인물에 독자 자신에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을 대입하는 일도 일어나며, 자기 자신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흔히 진실을 보는 창으로 비유되는 다큐멘터리와도 다르다. 다큐멘터리 속의 삶은 많은 경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만화 속의 삶은 ‘나’와 닿아 있는 우리들의 것, 혹은 적어도 보편일반의 한 부분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신과 함께>의 창문을 통해 보는 유성연 병장은 군대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게 하고, 펑펑 울고 있는 동현이(<그림2>)는 어린 동생이나 조카, 심지어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으로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독자가 느끼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다. 흐르는 것은 농도가 짙은, 순도 높은 눈물이다.
웃고 우는 만화적 리얼리즘의 판타지
<그림2> 신과 함께 이승편 19화 ⓒ주호민
독자의 눈물 젖은 공감은 <그림2>의 배경을 통해 통감(痛感)으로 이행한다. 이 배경은 동현이네를 퇴거시키기 위해 집에 들어온 용역들의 난동이라는 사건을 담고 있다. 잔뜩 어질러진 가재도구와 쏟아진 장독 그리고 그냥 발자국이 아닌 신발자국은 동현이의 눈물과 커다란 말풍선 소리와 겹쳐져 사건의 잔혹성을 환기한다. 이 짓밟힌 삶을 만들어 내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승편> 전반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구청직원들이 철거를 위해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는 철거민 대책의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파트 지어질때까지 어디서 살란 거요? 아파트를 하루에 지을수는 없잖여.” / “그래서 주거이전비 구백만원을 드리는 겁니다.” / “구백만원으로 집을 구하라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끼고, 담벼락과 창문에 빨갛게 칠해진 “나가라”와 “자진철거”에 고물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동현이 할아버지의 삶과 일주일 만에 발견된 오락실 할아버지의 주검을 겹쳐 연상하고, 사람도 아닌 가택신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분노한다면, 이미 그 독자는 통감의 역치를 초과해 버린 것일 테다.
게다가 그 독자는 이미 웃다가 저승의 법칙을 내면화했기에 울면서는 그 법칙으로 지옥 같은 이승의 부정성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더더군다나 <신과 함께>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신들(차사들과 가택신들)이 “말이 안되잖아”, “지옥이 따로 없구만”, “내 동생은 어쩌란 말이야!”와 같이 독자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 줄 때,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승 사건에 결국 간섭할 때, 독자들은 신들의 통감에 다시 공감한다. 이것이 만드는 효과는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초월적 위치에 있지만 이승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신들의 시선으로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 신들처럼, 독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독자 스스로를 이입하고 있던 신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현실에 참여할 때, 그것이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는 뼈저리다. 끝까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으려던 철융신이 인간의 삶이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몸을 사리지 않고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 독자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장면, 용산참사를 상징하는 여섯 명의 사자(死者)를 데리러 재개발 반대 농성장을 향하는 차사들의 저 실루엣(<그림3>)은 <이승편>이 연재되는 내내 타이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아무리 무딘 독자라고 해도 <신과 함께>라는 창문이 그동안 무엇을 비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몰랐다 해도 다른 이들의 댓글을 통해서라도 눈치 챘을 것이고. <신과 함께>가 군데군데 배치했던 힌트들(용역 보스와 시공사 중역의 대화나 경찰과 용역의 공조관계 등)을 캐치한 섬세한 독자라면, 차사들이 밟고 있는 저 쓰레기더미의 근원까지도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후경 속의 크레인이 개발의 랜드마크인 동시에 소금꽃의 투쟁처라는 것까지도 연상했을지 모른다. 이런 독자들이 <신과 함께>로 웃고 울다 탄생한다. 그것이 이 색다른 판타지의 힘이다.
편편마다 수천 개씩 달린 댓글을 독자에 대한 이해의 자료로 활용했지만 이 글이 상정하는 독자가 얼마나 존재할지 혹은 탄생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히 만화적 리얼리즘이라 할 이 판타지가 정말로 힘을 지닌다면, 그 힘은 독자를 성장하게 하는 힘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야 할 터다. 물론 그 힘은 <신과 함께>가 ‘만화’와 공론장의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는 ‘웹툰’이라는 두 멋진 형식의 힘을 손오공의 원기옥처럼 끌어 모아 쏘았기 때문에 분출되었다. 힘없는 신들이 쏘아올린 작은 원기옥이 어디까지 날아갈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만약 이승이 조금이나마 더 살만한 곳이 된다면 그것을 이끈 아주 작은 지분은 <신과 함께>에 있을 것이다.
<그림3> 이승편 최종화 ⓒ주호민
싱크 5호에 기고한 글